1인 창무극의 1인자로 영광을 빛낸 무용가, 공옥진
1인 창무극의 1인자로 영광을 빛낸 무용가, 공옥진
  • 박수연 기자
  • 승인 2017.01.24 1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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춤이 곧 인생이고, 인생이 곧 춤인 한국무용계의 전설인 무용가

대한민국의 대표적인 판소리 명창이자 민속 무용가였던 공옥진 여사는 전라남도 지방문화재 공대일의 4남매 중 둘째로 출생해 어려서 어머니를 잃고 아버지에게 창을 배우기 시작했다.
  10세 전후해서 당대의 무용가 최승희 휘하에 들어갔는데, 정확히는 일본에 있는 최승희의 밑에서 정식으로 춤을 배운 것이 아닌, 공 여사의 부친이 징용 끌려가는 것을 막기 위한 돈을 마련하고자 돈 천원에 딸인 공옥진을 최승희에게 몸종으로 팔아 버렸다고 한다.
  여기서 겪은 고초는 이후 1人창무극 '심청'에서 구구절절이 묻어나온다. 공옥진 선생의 인생을 다룬 책 '병신춤을 춥시다'를 읽어보면 최승희가 좋아하는 배를 가지고 오다가 전철 승강장에서 가방 끈이 풀려 승강장에 전부 굴러갔는데 주변의 일본인들은 "조선 아이가 배가 흩어졌다고 운답니다"라고 웃기만 하며 도와주지도 않고 최승희는 배가 꼴이 왜이러냐고 힐책했다고.
  참고로 최승희는 평소에 제자들에게 자기 발을 씻기에 할 정도로 제자들을 자기 하녀 부리듯이 마구 험하게 부려먹었다고 하는데 하물며 공옥진 여사는 정식 제자도 아니고 몸종으로 팔려온 신세였으니 그 고초가 심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 여사는 춤을 훔쳐 배웠고, 최승희는 공 여사가 춤을 배우고 싶어 한다는 사실을 알고는 춤을 조금씩 가르쳐 주었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다른 조선인에게 공여사를 돈 2천원을 받고 다시 넘겨 버렸지만 태평양 전쟁의 와중에 귀국할 수 있었다.
  귀국 후 여러 극단을 전전하며 공연했다. 절에 한번 들어간 적도 있는데 고기가 너무 먹고 싶어서 고기 구워먹는 등산객들에게 '병을 앓고 있는데 고기 먹는게 최고라더군요'라고 하고 등산객들과 고기를 먹고 고기 냄새가 날까봐 생쌀을 씹어서 고기 냄새를 감추려 했다고 한다.

우여곡절 끝에 춤 명인이 된 공옥진 여사
  춤에 있어 우리 고유 민속무용에만 국한되지 않았다는게 놀라운데, 곱사춤의 명인이라 불렸음은 물론, 원숭이·퓨마 등 동물을 모의한 춤까지 선보여 전통연예인이면서 예술적 표현력의 왕성함을 보이는 창작인이기도 하다.
  특히 공옥진하면 빼놓을수 없는 것이 바로 1인 창무극과 병신춤이다. 1인 창무극의 경우 심청전·흥부전 등을 일인극으로 엮어 노래와 춤, 연기 모방춤으로 이끌어내는데 심청전의 경우 일생을 살아오면서 겪었던 평지풍파가 그대로 묻어내며 관객들을 웃고 울게 만들었다.
  병신춤의 경우 본래 경남 밀양 지방에서 오랫동안 농민들이 추던 춤을 연기하였는데 이후 매스컴에서 화제가 되기도 했다.
  하지만 장애인을 희화화했다고 하여 그들에게 비판의 목소리를 듣기도 했지만, 오히려 직접 그들에게 직접 다가가 자신이 병신춤을 공연한 것에 대한 뜻을 이야기하고 또한 그들 앞에서 직접 공연까지 했다.
  그날 춤을 추는 사람, 보는 사람 모두 그 자리에서 그대로 울고 웃었다고. 참고로 공옥진 본인도 지체장애인으로 일생을 보낸 동생이 있었고, 평생 그 동생을 보살폈다고 한다. 그럼에도 공옥진 선생이 장애인들을 희화화했다고 한다면 그건 어불성설이다.
  공옥진의 1인 창무극은 전수중인 수제자가 없어서, 결국 1인 창무극의 맥은 끊기고 말았다. 엄밀히 말해 제자가 없는것은 아니지만, 유일하게 남은 제자인 한현선(1인 창무극 전수자)도 1인 창무극이 아닌 판소리로 전공에 통과한 것.
  게다가 윗전에서는 이전부터 전래되어 오던 '전통무용'이 아닌 공옥진 자신의 '창작무용'이라는 이유로 인간문화재 지정이 거부되었다.
  이 사실이 알려지고 공론화되자 2009년 영광군청 측에서는 전남도청에 문화재 지정을 다시 신청한 상태이며, 유인촌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이 공옥진 여사 댁에 직접 방문해 약속하는 등 긍정적으로 검토된 끝에, 결국 2010년 5월에 드디어 1인 창무극이 전남 무형문화재에 등재되었다.
  허나 아직 1인 창무극의 경우 '심청전' 하나만이 지정되었을 뿐이고, 나머지 1인창극 '흥보가'와 동물춤-병신춤 등은 아직도 문화재 등재가 안됐다. 공옥진 선생 본인이나 지지자들은 1인창무극의 명맥이 제대로 이어지게 됐으니 이거 하나라도 지정된 것만이라도 다행이라고 하는중.
  2010년 6월에는 고향에서 대학교에 나가서 공연을 했는데, 그 치열한 데모판 한가운데에서도 공연하지 않은 대학이 하나도 없다고. 때문에 당시 대학에 다니던 사람들은 공옥진에 대한 기억이 확실히 박혀있다.
  이를 계기로 오만 가지 표정으로 몸의 관절을 꺾고 뒤틀고 푸는 곱사춤, 전통무용에 동물의 몸짓을 해학적으로 접목한 동물춤과 판소리, 연기 등이 어우러진 그의 공연은 '1인 창무극(唱舞劇)'이라는 이름으로 널리 알려졌다.
  1980년대와 1990년대 전반에 걸쳐 왕성하게 활동하면서 판소리의 음악적 측면뿐 아니라 '아니리(판소리에서 창을 하는 중간중간에 가락을 붙이지 않고 이야기하듯 엮어 나가는 사설)’와 '발림(판소리에서 소리의 극적 전개를 돕기 위하여 하는 몸짓이나 손짓)’ 등을 극적으로 발전시킨 1인 창무극을 연행(演行)하여 문화변용의 전형을 이루었다는 평가를 받았으며, 소외된 사람들의 한을 표현하는 그의 공연은 대중적으로도 큰 인기를 모았다.
  또한 미국 링컨센터에서 아시아인으로는 최초로 단독 공연을 한 것을 비롯하여 영국·중국·일본 등지의 해외 공연을 통하여 가장 서민적인 한국 예술을 선보였다는 평가를 받기도 하였다.
  이후 계속적으로 1인창무극과 민속무용 연기모방춤, 병신춤 등등의 공연으로 다양한 활동을 보였지만, 두 차례의 뇌졸중과 한 차례의 교통사고로 인한 건강 악화와 노환으로 2012년 7월 9일 향년 81세의 나이로 타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