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8 특집] "5.18민주화 운동" 숭고한 희생에 부끄럽지 않길
[5·18 특집] "5.18민주화 운동" 숭고한 희생에 부끄럽지 않길
  • 박수연
  • 승인 2016.05.17 1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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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민주화 묘역전경 (5.18기념재단제공)

‘박정희 시대’의 종말과 민주주의의 여명
 신군부는 국가 권력을 장악하기 위해 ‘12·12 군사정변’을 일으켰다. 이에 반하여 재야인사와 주요 야당의원은 ‘계엄해제와 민주화 이행’을 주장했고, 전국의 수많은 대학생은 학원의 자율화와 민주화를 요구했다. 민주화에 대한 열망이 사회 전반에 걸쳐 분출되던 ‘80년의 봄’이었다.
1980년 5월 10일, 23개 대학 대표로 구성된 전국 총학생 회장단은 ‘비상계엄의 즉각 해제, 전두환·신현확 등 유신잔당의 퇴진’ 등을 담은 결의문을 포고하였고, 거리시위를 계획했다. 이런 시위의 조짐을 감지한 전두환 중앙정보부장은 북한이 남한을 침략할 조짐을 보인다는 이유로, 비상경계태세 돌입 명령을 내렸다.
 5월 13일부터 민주화를 요구하는 사람들은(특히 대학생을 중심으로) 거리시위를 시작했다. 5월 15일 서울역 앞 집회는 그 정점을 이뤘고, 그날 밤 신현확 국무총리는 시위를 그만두라는 특별담화를 발표했다. 그에 반발한 시위대는 ‘서울역 회군’을 단행했고, 야당 지도자들은 정부 측에 ‘19일까지 시국수습대책에 대한 답변을 하라’ 요구했다. 그러나 신군부는 5월 17일 24시를 기해 전국 계엄령 확대를 시행했다. 시위는 서울뿐만이 아닌 광주에서도 전개되었다.
 5월 14일, 전남대학교 총학생회장이던 박관현을 필두로 대학가와 전남도청 일대에서 거리시위가 벌어졌다. 시위를 벌이던 사람들은 “계엄령을 해제하라”, “전두환은 물러가라” 는 구호를 외쳤다.

국민의 기대와 요구를 저버린 신군부의 ‘계엄령 확대’는 많은 이들이 시위에 가담하게 만들었다. 신군부는 재야 정치인과 민주화운동 관련자를 시위의 중심세력이라 여겨 연금하고 구금했다. 또 국회를 비롯한 정부기관, 대학, 각종 언론사와 방송사 등에 계엄군을 주둔시켰다. 이때, 전북대학교에 주둔한 계엄군에 의해 이세종 학생이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하기도 했다.
 5월 18일 계엄군은 전남대학교 정문 앞에서 등교를 하는 학생들을 막아 세웠다. 이에 학생들이 거세게 항의하자 계엄군은 진압봉을 앞세워 학생들을 구타하고 연행하기 시작했다. 이를 만류하려던 시민까지도 폭행을 당했다. 등교하지 못한 학생들은 이런 계엄군의 폭력을 알리기 위해 전남도청으로 진출했다. 소식을 전해 듣게 된 사람들도 하나둘, 도청으로 몰려들었다. 이때만 해도 시민은 소극적이었고, 조직화되지 않았다.
 이후 계엄군은 조금이라도 사람이 모이면 해산하라는 위협과 폭력을 가했다. 계엄군의 진압봉은 경찰의 진압봉과는 다른 형태로, 구타를 당한 시민은 심각한 부상을 입었다. 계엄군의 잔인함에 분노한 시민이 계엄군의 의도와는 달리 거세지고 집단화되자, 계엄사령부는 광주지역의 통행금지 시간을 저녁 7시로 조정했다.
 5월 19일 새벽 3시경 증파된 계엄군이 광주역에 도착했다. 시민의 저항은 극심해졌고, 도심곳곳에서는 시민과 계엄군의 격렬한 대치와 충돌이 일어났다. 장갑차와 헬기까지 동원하던 계엄군은 결국 발포하기에 이르렀다.
 19일 오후 4시 30분경, 당시 고등학생이었던 김영찬 군은 계림파출소 인근에서 계엄군이 쏜 총에 맞아 중상을 입었다. 전날 계엄군에게 영문도 모른 채 무자비하게 구타당했던 청각장애인 김경철 씨도 19일에 사망했다.
 20일 오전 8시경, 계엄 당국에 의해 중학교와 고등학교에도 휴교령이 내려졌다. 오후가 되자 도심으로 다시 사람들이 모여들었고, 계엄군은 진압봉으로 이를 저지하려 했다.
 오후 6시 40분경, 금남로에는 버스, 화물차, 택시 등으로 구성된 200여 대의 차량 시위대가 출현했다. 계엄군과 경찰은 최루탄과 가스로 이를 저지하고, 탑승자를 공격했다. 사람들은 노동청과 세무서로 몰려가 정부의 잔혹한 진압을 규탄했으며, 광주의 상황을 제대로 보도하지 않는 방송국에 찾아가 항의하기도 했다. 이 과정에서 광주 MBC방송국 건물에 화재가 발생하기도 했다. 전남도청을 지켰던 사람들과 계엄군의 재진입, 15년간의 5·18정신 계승투쟁시내를 재장악하기 위해 화정동에 위치한 ‘돌고개’를 넘고 있다.
 5월 27일 새벽, 광주 도심 곳곳에서는 ‘계엄군이 쳐들어오고 있습니다. 시민 여러분! 우리를 잊지 말아 주십시오’라는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이 소리는 오래도록 광주 시민의 뇌리에 남아 5·18민주화운동의 정신을 잇겠다는 의지와 열정을 갖게 만들었다. 도청을 사수해 버티기 어려울 것임을 누구나 알았지만, 많은 시민군이 도청에 남아있었다. 새벽 4시경, 계엄군은 다시 도청을 향했다. 교전 시간은 1시간 남짓에 불과했고, 윤상원을 비롯한 많은 시민군이 시신으로 남겨졌다. 이날 전남도청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이 머물렀고, 얼마나 많은 이들이 죽었는지 아직까지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고 있다. 당시 생명을 잃었던 많은 이들이 지금, 망월동 시립묘지 제3묘역에 안장되어 있다.
 5·18민주화운동은 이후 한국 사회에서 지속적으로 전개된 민주화운동의 원동력이 되었고, 군부독재에 결정적 타격을 가한 87년 6월 항쟁의 밑거름이 되었다.  5·18민주화운동은 95년 5·18특별법으로 제정되었으며, 전직대통령이었던 전두환, 노태우 등 92명이 내란·내란목적살인죄 등으로 처벌받기까지 전 국민의 염원이 모여 5·18민주화운동 정신계승으로 이어졌다.
 저항과 참여, 연대의식은 오늘날 세계 곳곳에 중요한 민주화운동 사례로 알려지고 있다. 이러한 중요성을 인정받아 2011년 5·18민주화운동 관련 자료들은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자료 출처 5.18기념 재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