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은 강항의 올곧은 정신이 서려 있는 불갑 내산서원
수은 강항의 올곧은 정신이 서려 있는 불갑 내산서원
  • 박수연기자
  • 승인 2016.05.24 11:2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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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원 앞 정원에서
정원 앞 연못에 정자
내산서원 뒷편의 흑죽
수은 강항 선생 동상
내산서원 앞 정원

전라남도 기념물 제28호로 지정된 내산서원은 조선 중기 문신인 수은 강항(1567~1618)을 추모하기 위해 세운 서원이다.
 최초의 건립지는 강항의 태생지인 불갑면 금계리에 위치한 유봉 마을 이었다.
 창건 이듬해인 1636년(인조 14년)에 화재로 소실 되자 김지수, 임담, 김방급 등의 주도하에 마을 이름에 따라 용계사라 하였고, 판액은 송시열(조선 후기의 서인 성리학파의 종주)이 썼다고 전한다. 이 편액은 사우 훼철 후 후손들에 의해 보관되어 오다가 한국전쟁때 소실되었다고 전해진다.
1682년(숙종8년)에는 윤순거를 추가로 배향하였는데 이는 윤순거가 강항의 수제자였고 향사들의 추앙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용계사의 창건이나 강항의 저서인 "수은집" 편찬 등에 주도적 역할을 담당했기 때문이다. 1702년(숙종 28년)에 고쳐 세웠지만 조선 말기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으로 훼철 되었다가 1974년  복원시에 내산서원으로 개칭 되었다.
수은 강항은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모아 활동하다가 영광마저 함락 되자 가족들을 이끌고 이순신 장군의 수군진영에 합류하려 했으나 논잠포구(지금의 염산면)에서 일본군의 추격을 따돌리기 위해 바다로 뛰어내렸다가 낮은 수심으로 결국 일본군이 던진 갈고리에 걸려 건져지고 그 와중에 아들 용과 서녀 애생을 잃었다.
포로로 잡힌 강항은 일본에 도착 후 교토의 후시미성으로 이송되어 후지와라 세이카, 아카마쓰 히로미치등에게 성리학을 가르쳐고 후와라 세이카는 일본 주자학의 개종 조사가 되었다.
 일본 본국에서 억류된지 2년 8개월이 흐른 후 1600년에 가족들과 귀국 할 수 있었다.
 4년에 걸친 일본에서의 포로 생활을 수록한 "간양록"은 그가 일본에서 보고 들은 일본의 내정이나 국토의 특징, 당시의 여러 다이묘의 정세 등을 세세하게 적은 것으로 왕조에 대한 의견제출서로서의 측면이 강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최근 내산서원이 새롭게 정비 되면서 서원 앞에는 조그마한 연못과 정자등이 자리잡은 정원이 꾸며 졌다.
 일본에서 포로 생활을 하며 항상 고향을 그리워 했을 수은 강항 선생의 넋과 조국의 평화를 위해 적국의 실상을 낱낱이 기록했던 유학자의 일편담심을 아이들과 함께 조용히 거닐어 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자료 정리
박수연기자.